아이데이션은 수집과 분류의 다른 말
기획자의 키노트
2. 수집과 분류, 기획자의 역량
3. 스토리텔링, 어쨌건 모든 건 이야기
문제정의가 되면, 그리고 그것이 설득이 되면 비로소 해결책을 찾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됩니다. 우리가 수많은 정보에서 답에 닿기 위해 하는 일이 바로 수집과 분류의 일입니다. 즉, 아이데이션은 결국 수집과 분류의 다른 말에 불과합니다.
답이 아닌 문제를 위한 자료조사
대부분의
회사에서 프로젝트 초반에 자료조사의 단계는 팀의 신입이 맡을 때가 많습니다. 이때의 자료수집은 정량
분석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아, 문제정의와 같이 정성 분석이 필요한 일에 비해 아직 경험이 부족한 팀원이
처리해도 된다고 간과하기 쉽죠.
<출처 - columbia university>
자료수집
역시 문제정의만큼이나 수집되는 자료들로 인해 기획자가 생각의 틀에 갇히기 쉬운 지점입니다. 수집을 할
때 이미 의도를 장착하거나, 수집한 자료의 섣부른 일반화가 개입하기 때문이죠. 기초 조사를
하면서도 우리는 관성처럼 답에 이끌립니다. 지금은 최대한 답을 상정하지 말고 수집해야 합니다. 자료를 수집해서 문제를 분류하고, 그 문제가 손에 잡힐 듯 보이게
되면 답은 그때 모습을 드러냅니다.
먼저, 우리는 이미 문제정의를 통해 꽤나 핵심 정보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문제가 '다시' 정의되었다면 관점과 관련된 일일 확률이 높은데요. 바로 그 문제정의에서 수집된 자료들의 관계도를 그려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자료를 수집할지 그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품의 기능이 아닌 유통의 문제였다면, 광고가 아닌 CSR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면, 가망고객의 범위가 아닌 깊이의 문제였다면, 그곳이 바로 자료를 수집하는 입구가 됩니다.
당신의 불완전함이 필요하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료조사의 수준은 지난 1,2년 사이 급격하게 발전했습니다. AI의 출현과 보편화 때문이죠. 방대한 범위에서 핵심적인 사항들을
뽑아주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까지 노련하게 정리해 줍니다. 특히나 자료 수집은 엄청나게 수월해졌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엄청나게 위험하기도 합니다.
"AI가 아직 뛰어넘을 수 없는 건 인간의 불완전함"
AI의 도래로 대부분의 조직에서 문제정의와 해결안을 위한 방법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AI 찬양론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생성형 AI를
통한 해결안 모색에 있어서 가장 취약한 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편향성입니다. chatGPT는 당신의 문제정의에 가장 부합한 형태로 자료를
조사하고, 그 자료의 타당성을 높이기 위한 치밀한 논거를 제시합니다.
엄청난 내 편이죠. 하지만 아직까지 사람과 AI의
차별성이자 AI가 뛰어넘을 수 없는 지점은 바로 사람의 불완전함입니다.
우리가 앞서 내린 문제정의는 당연히 잘못됐을 수 있습니다. 자료를 견고하게 추적 분석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미묘한 감성적 부조화로 그게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논리와 숫자로만 비즈니스의 결과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건과 조건이 존재하죠. 그러니까 비즈니스에서는 결과적으로 어느 게 답이고 어느 게 틀렸다고 그 상황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도쿄에서 deep research를 출시할 때의 샘 알트먼. 사실 딥리서치를 처음 써보고는 놀라움에 앞서 거의 무력감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획자 5명 보다 GPT를 잘 활용하는 기획자 1명이 더 나아보였으니까요. <출처 - Yuichi YAMAZAKI / AFP>
신입
팀원에게 자료조사를 시키면 섣불리 답을 상정하고 그 답의 논리에 부합한 자료를 구성하는데 여념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AI도 그런 성향이 강한데, AI는 그러니까 '우리가
집중한 문제 정의에 기반해서' 탁월함을 선보입니다. 그의 설득력 높은 자료와 분석 논거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는 어느새 그 방향으로 '답'을 견고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정답을 찾자고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발 뒤로 빠져 나와 다른 시각(동의하지 않는 다른 문제정의)으로도 AI가 논거를 전개해 보도록 해야 합니다. 엄청난 속도로 답을 향해
질주하는 AI와의 채팅창 속에 갇히지 말고 중요한 자료와 포인트를 잘 스크랩해서 자료의 '단위'로 어딘가에 부착해 놓으면서 자료를 수집해 나가길 바랍니다.
화이트보드, 최고의 사고 툴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고를 선형적으로 연결하고자 합니다. 이 자료를 찾으면 이 자료의 근거를 찾고 그 근거의
타당성을 강화하는 식이죠. 연결 지점을 놓지 못하는 것은 뇌가 하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입니다. 그래서 제안하는 바는 연결 지점을 놓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자료를, 아이디어를 옆에 다 안전하게 놓아둘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생각으로, 전혀
다른 시각으로 넘어가기가 수월해집니다. 그것이 웹에서 찾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북마크만 잔뜩 해두어서는 그것들의 연결 구조라는 과제 속에 뇌는 묶이게 되죠.
저는
자료와 아이디어를 안전하게 킵해두고 나중에 수월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방법으로 화이트보드를 활용합니다. 화이트보드가
없을 때는 수많은 A4지에 메모를 하고 그것을 바닥에 모두 깔아 놓고 보곤 합니다. 그래서 아이데이션이나 자료수집과 관련한 제 스프링 노트들은 대부분 종이가 다 뜯겨 있습니다.
애플의 freeform 시연. 다양한 화이트보드 앱이 있습니다. 대부분 실시간으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실제 화이트보드와는 달리 오브젝트를 쉽게 이동 가능합니다. 분류화에 좋겠죠.<출처 - 애플>
제가
머리가 안 좋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뭔가 가시적으로 그 자료들이 한눈에 다 보이고 그것을 구조화할 수 없으면 통합적 사고라는 것을 잘할
수 없습니다. 백지에 아래로 '서술'을 하는 게 아닙니다.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는 키워드나 문구, 이미지들만을 무분별하게 벽에 채워 넣습니다. 포스트잇으로는 덕지덕지
붙이죠. 어떨 때는 한 가지 자료에서 꼬리를 좀 더 물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근처의 자료에 부가 자료들이 자리하겠죠. 꼭 근처에 자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보드 내에서는 아무리 분절되어 있어도 이 자료들은 쉽게 다시 연결되거나 무리 지을
수 있으니까요.
분류, 구조적 사고를 위한 명료함
조사한
자료들을 화이트보드에 다 붙이고 나면 하는 첫 번째 일은 이 자료 또는 아이디어들이 문제에
관한 일인지, 답에 관한 일인지 딱 두 가지로만 분류 합니다. 답에 관한 자료가 더 많다면 다시 문제에 관한
자료를 더 찾아야 합니다. 문제 해결을 제시하는 자료보다 중요한 것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 자료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자료를 이 두
가지로 분류해보면 문제와 답이 페어링 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것들은 보드의 가장자리에 일단
밀어둡니다.
문제와
답의 두 분류로 나눴지만 여전히 보드는 너저분하고 거기에서 무언가 보이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일은 이 자료들을 덩어리 짓는 일 즉, 분류하는 일입니다. 자료를 '분석'한다고 먼저 접근하기 쉽지만 분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분류입니다. 어떤
문제든, 심지어 문제정의가 확실히 되어 있는 문제 조차도 가장 큰 문제는 그 문제 안에 문제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압도감에 우리는 정신이 아찔해지고, 조직은
해결을 요원한 일로 믿기 시작하지요. 마구 나열된 자료들을 보니 50개의
문제가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는 일은 그것을 그저 다섯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분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분류입니다."
범위가
걸쳐진 자료(아이디어)도 있겠지만 우선은 가장 중요한 카테고리로
그 자료를 위치시킵니다. 분류하고 봤더니 다섯 개의 카테고리 중 한 덩어리의 카테고리는 나머지 카테고리의
논점과 중요도에 비해 떨어져 보입니다. 그러면 그 카테고리를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 안에 든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도저히 그럴 수 없겠다면 어쨌거나
눈에서 먼 보드의 가장자리에 옮겨둡니다. 이제 보드에는 네 개의 카테고리만 존재합니다.
제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보드 중 하나입니다. 자료 수집과 아이데이션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의 과정에서 분석은 필수적으로 수반되지만 바로 이 '분류의 작업'이
가장 명석한 분석을 요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류가 잘 된 것만으로도 해당 분류에서 더 보완되어야
할 자료와 시각은 수월하게 추적할 수 있으니까요.
이 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방대한 자료를 단순화하되, 구조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가시화하는 일입니다. 생각의 단위에 구획을 지어주는 것만으로도 자료를 바라보는 명료함은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이와 같이 구조적 사고를 도울 수 있다면 화이트보드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수월한 툴을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겠습니다.
분류의 고도화
카테고리 안에는 문제 원인, 고객의 소리, 레퍼런스, 답의 논거, 주장의 인과관계 등 다양한 자료와 아이디어가 존재합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라벨의 형태를 취해주는 것도 명료함과 가시성을 더해주겠죠. 조사할 때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특정 자료는 다른 자료에 비해 다른 무게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이라이트나 크기, 다른 도형 등을 사용해 다양하게 그 중요도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각 카테고리는 인과 관계일 수도, 병렬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자료는 이종의 카테고리 속성을 갖기도 하고요. 이제 자료와 자료 간, 카테고리와 카테고리 간 연결선을 그으며 구조를 형성합니다. 관계도를 그리면 그 관계 사이에서 또다른 인사이트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그 인사이트가 기획에 있어 가장 순도 높은 키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어느 회사, 어느 사무실에서 일하건 벽에 화이트보드를 요청합니다. 일단 적어 놓고, 눈에 익히고, 서로 연결합니다. 그것이 아이디어가 되죠. 그림을 잘 그리는 장치로 화이트보드를 오용하지 말기를.
다양한
문제에 관한 다양한 답(아이디어)이 나왔고 우리는 이를 다시
문제에 집중해서 재분류화 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건 가격과 관련된 문제, 이건 소비자 커뮤니케이션 문제, 이건 불분명한 가치 규명에 관한
문제, 이건 내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등. 이 분류들이 정가운데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 해결과
긴밀하게 관계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여 아이데이션을 하는 과정은, 종국에 관객에게 눈물을 훔치게 할 대단한 오페라를 작곡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챕터를 나누고 챕터에 필요한 배우와 음악, 미술을
구분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에 더 잘 어울리는 배우, 더 드라마틱한
음악, 더 아름다운 미술을 찾는 데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수집과 분류의 반복 과정을 통해 챕터의 완성도는
높아집니다. 이제 이것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의 연출과 편집 과정이 이어지면 관객이 감동할지 말지가 판가름
나겠죠.
다음 주에는 마지막으로 이 아이데이션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관한 단계인, '스토리텔링, 어쨌건 모든 건 이야기'편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