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 이야기

3장. 당근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첫 발표를 하다.

한원아

2020.10.20 11:23 조회수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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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터는 스스로 미디어가 되어야 합니다 

 

위의 주제를 가지고 마케팅 컨퍼런스 강단에 섰다. 당근마켓 마케터라는 이름을 단 채 마이크를 잡은 첫 날이기도 하다. 그 말은 즉슨 나는 결국 당근마켓의 일원이 되었다는 말이다.

잠시만 합격 전화를 받은 날을 떠올려보자.

 

그날은 대전광역시 둔산동의 어사출또(는 횟집이다)에 있었다. 삼시세끼 회를 먹어도 행복하다고 외치고 다니는 터라 그날 역시 회를 먹고 있었다는 것은 내 주변인이 생각하기엔 지극히 평범한 날이었다(하지만 난 회를 먹는 나날이 특별한 날이다). 고등학교 친구 이감자와 둘이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친구들을 만나면 대부분 이야기의 주된 소재는 '직장'과 관련되어 있더라. 정확히는 '직장 쌍욕'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퇴사한지도 어언 3개월을 훌쩍 넘겼으니 쌍욕에 대해 그리 미련이 없었으므로 감자의 쌍욕을 들어주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감자의 "맞지?" , "그치?" 에 적당히 "아이- 그럼!" , "당연하지-" 라는 맞장구, 그리고 3개월간 단체 채팅방에 싸질렀던 수많은 나의 늦잠 인증 사진 — 퇴사자의 여유라고도 불린다(사진 참고) — 을 감자에게 상기시켜주지 않는 것이다. 그 쌍욕 불씨가 언제 내 발등에 튈지 모르므로.

 

 

실업자 시절, 약 12시 - 13시 평일 단체 채팅방에 이런 사진을 주기적으로 올리곤 했다. 그러면 친구들의 거친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맞지?"

감자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평소에 잘 기억나지 않는 내 휴대폰의 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물론 이렇게 울리진 않았지만 편의상 '따르릉'이라 한다)

거꾸로 뒤집혀 있는 휴대폰에 찍힌 번호를 슬쩍 돌려 보고 감자의 질문에 얼른 대답 — 퇴사자의 여유를 상시 시켜주면 안 된다! — 을 해야만 했다. 아니,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앗, 감자야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모르는 번호 11자리가 찍혀 있고 그 번호가 누구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순간 나의 머리를 스쳐가는 1주일 전 성황리에 마친 '한재원' 시연회가 번뜩거렸다.

 

"암행어사 출두요!" 하고 몽룡이가 춘향 앞에 나타난 것처럼 '한춘향'은 '당몽룡'의 소식을 하염없기 기다렸다. 1년 같은 1주일. 그 기다림은 설렘 그리고 감동으로 이어지는 대 서사시로 끝맺음할 수 있을까.

 

"여보세요?"

가게를 잠시 빠져나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당근마켓의 공동대표 김용현(게리)이라고 합니다."

옳거니, 올 것이 왔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라는 말 앞의 '어'는 반가움과 깜짝 놀람의 뉘앙스가 섞인 감탄사였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푸른 밤> 게리는 어떤 연주보다도 아름다운 음조의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최종 합격하셨고요. 한재원님의 역량과 능력이 저희와 잘 맞을 것 같다고 판단되었습니다. 끝으로 메일 드렸으니, 참고하시어 희망 연봉과 필요한 장비를 적어서 보내주시면 감사할게요."

아, 변사또의 갖은 괴롭힘에도 털 끝 하나 까딱거리지 않던 성춘향. 그리고 끝내 이몽룡이 돌아온 그 날 춘향이의 마음이 어쩌면 내 마음과 꼭 맞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이 보시게들! 어사 출또요!'

어사출또 문을 박차고 들어와 힘차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다간 회 몇 점 못 먹어 보고 짐 싸서 나와야 할 게 뻔했다. 그 대신 싱글벙글한 얼굴로 감자가 있는 테이블에 복귀했다. 그리고는 내 테이블에서 만큼은 힘차게 말했다.

"나 방금 당근마켓 합격 전화받았다!"

 

-

 

그로부터 3개월 뒤, 컨퍼런스 강단에 마이크를 잡았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컨퍼런스 발표자로 지정된 것은 아니다. 순전히 보고, 듣기 위해 참석자로 신청을 했다. 신청 후 그곳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는데 소정의 협찬을 해주면 짧은 발표(여기서는 라이트닝 토크lightning talk 라고 불렀다)의 기회를 준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서비스를 알고 다른 누군가에게 알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았기 때문에 당근마켓 구성원에게 협찬에 대해 알리고 라이트닝 토크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주제는 마케팅 관련 경험 또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 시간은 10분을 준다고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10분에 9분 50초는 당근마켓 홍보로 잔뜩 치장하고 싶었지만(나머지 10초는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이다) 발표의 핵심은 '듣는 이'를 고려하는 것이므로 약 3분은 당근마켓의 서비스 이야기, 나머지 6분 50초는 마케터가 듣고 싶어 할 만한 매력적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결론은 내가 의도한 '마케터가 듣고 싶어 할 만한 매력적인 이야기'에는 잔뜩 당근 크림을 발라놓고 은연중에 당근 냄새를 살짝살짝 맡게 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내 발표 역사상 가장 최악의 발표였다.

모든 공식 발표(여기서 공식 발표란 이 컨퍼런스의 주최자가 직접 섭외하여 공식적으로 초대받은 연사의 발표를 말한다. 즉 우리가 지불한 값을 하는 사람들의 발표인 것이다)가 끝나면 나를 포함한 4팀이 라이트닝 토크를 순서대로 진행할 터였다. 공식 발표가 '딱-' 끝나는 그 순간, 그곳의 현장은 마치 대자연 재해가 오기 직전 그 낌새를 눈치챈 사피엔스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의 대이동을 연상케 했다. 약 150명을 수용하는 그곳의 강연장은 나에게 딱 15초만 준다면 마음먹고 셀 수 있는 그런 인원밖에 남지 않았다. 난 속으로 대이동을 한 그들을 욕하는 대신 '내가 준비한 대자연 재해가 실은 당신들네 인생에 조금은 청량감을 줄 거름일 터인데, 이걸 듣지 못하고 가버리다니. 불쌍하겠다'라고 자기 위안을 했다. 그래, 사실 당당히 욕을 할 걸 그랬다. 물론 속으로 말이다.

급기야 난 4팀 중 대미를 장식해야 했었고, 내 앞의 라이트닝 토크를 하시는 어떤 회사의 어떤 분은 멋들어지게 10분 중 14분 50초를 자신의 회사 소개를 하던 터라 굳건히 남아 있는 참여자의 눈은 점점 풀려갔고 내게 주어진 10분도 점점 깎여가기 시작했다.

발표를 하는 사람은 항시 예상치 못한 일에 대비해 마음의 안정과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전 지금 전혀 아무렇지 않답니다'라고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척'하는 것에 있어서 난 어느 정도 성공한 듯했으나 준비한 농담을 능청스럽게 이어가지 못해 텅텅 빈 강연장의 곳곳에 참여자들은 내 농담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을 농담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듣는 이가 알고 웃을 때 성공하는 법이다. 내 유머는 실패했다.

 

내가 느끼는 최악과 최선의 경계, 다른 사람이 느끼는 최악과 최선의 경계는 다른 걸까. 라이트닝 토크가 끝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나에게 강연 잘 봤다며 명함을 건네거나 후에 SNS 메시지를 주었다. 덧붙여 당근마켓이라는 서비스와 기업문화가 흥미롭고 매력 있다며 꼭 사용해보겠다며 기분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당근 크림을 몰래 발라 놓은 마케터가 듣고 싶어 할 만한 매력적인 이야기는 성공한 걸까. 난 왜 <마케터는 스스로 미디어가 되어야 한다>는 주제로 발표를 한 걸까. 그리고 난 왜 컨퍼런스라는 '미디어'에서 '당근마켓 마케터'로서 당근마켓을 이야기한 걸까.

 

받은 명함을 지갑 속에 꾹꾹 눌러 담으며, 발표 전에 당근마켓을 알리기 위해 책상에 붙여 두었던 옥외물의 잔해를 하나씩 하나씩 거두기 시작했다. 잔해가 별로 없었다는 건 다행히 내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대이동을 한 사람들도 당근마켓 옥외물을 보곤 당근마켓이라는 존재를 인지했을 터이다.

주말 하루의 약 7시간을 한 곳에 앉아 듣고 쓰고 말하는데 집중하다 보니 넋이 나간 채로 투벅투벅 집을 향해 걸으며 생각했다. 다음번엔 헤빙토크heaving talk의 강단에 서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마케터가 되기로 말이다.

 

당근마켓 마케터 출두했습니다

 

 

다음 장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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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당근마켓을 너무나 사랑하여 당군으로 불리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 

2장. 당근마켓 최종 면접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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