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 이야기

1장. 당근마켓을 너무나 사랑하여 당군으로 불리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

한원아

2020.09.1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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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은 말이죠..

"아, 또 시작하셨네.."

 

'당근'이라는 운을 띄우기 무섭게 강배추님은 내게 추임새를 얹었다. 태초에 운을 뗐을 때 — 그러니까 방금 그 '아, 또..'라는 말을 할 수 없을 적의 태초를 말하는 거다 — 배추님을 포함한 스터디의 회원님들은 회사 자랑을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신기해하다가 요즘에는 '또 시작했다'며 비웃거나 비꼬는 듯하다.

 

"재원님의 성은 '한'이 아니라 '당'으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당근 당씨 해서 당재원으로."

 

배추님은 추임새도 모자라 내 새로운 이름까지 만들어 주셨다. 역시 비꼬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퍽 마음에 드는 이름이라 나도 모르게 멍청한 웃음을 보였다. 배추님의 괜찮은 네이밍 실력에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씰룩-거리며 웃음을 지었고, 난 그렇게 '당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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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퇴사하려고 합니다."

 

놀라지 마시라. 이건 당근마켓이 아니라 그 전 직장 상사에게 한 말이니. 그렇다. 나도 첫 회사는 따로 있었다. 그 회사는 마케팅 에이전시(대행사)라고 불리지만 실상 클라이언트('광고주' 또는 '갑'이라고도 한다)의 뒤를 봐주고 허리 필 날, 잘 없는 '을'들이 만들어 가는 회사이다. 띄어쓰기 두 번 했다고 쥐 잡듯이 까임을 당하고, 갑에게 어떻게 하면 내 따뜻한 감정이 글로 잘 전달이 될까 고민하며 메일을 보내는 데만 몇 시간 고민하는 그런 비효율적 집단이 똘똘 뭉친 곳이다. 대한민국 거의 모든(아마 모든이 확실하다) 에이전시는 이렇게 똥이 놓여 있으면 치우기 전에 삽으로 치울지, 휴지로 치울지 고민하는 데만 하루의 절반을 소모하는 곳이다. 그냥 저스트-온리 당장 치우면 될 것을 '무엇으로 치울까'라는 쓸 데 없는 고민에 몇 시간을 쓰는 곳이거니와 어쨌든 똥이 가득한 곳이다. 나는 이런 경험을 토대로 대행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회사는 이런 식으로 돌아가겠거니, 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래서 퇴사를 말하고 프리랜서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지금 생각해보니 프리랜서도 을이잖아?).

 

"아직 재원은 이곳에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해요.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퇴사를 하려는 거죠? 조금만 더 있으면 확 성장할 수 있는 게 눈에 보이는데.."

 

지브리 음악의 선율 같은 목소리를 가장한 채 상사는 내게 조곤조곤 말했지만 배후에 유바바(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온 못돼 처먹은 할머니 마녀다)의 계략 같은 것이 보였다.

 

'아직 재원은 써먹을 게 남았어요. 당장 나가면 새로운 사람 구해서 또 가르쳐야 하는데 왜 퇴사를 하려는 거죠? 조금만 더 있으면 발목 잡혀서 나가지도 못하게 될 텐데..'

 

무서운 생각을 해버렸다. 상사가 저런 나쁜 마음을 품었다 생각하지 않는다(어쩌면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정해진 시간 안에 이곳을 빠져나와 치히로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대로 사고가 나서 죽어도 상관없을지 몰라.'

 

언제였을까. 그날도 '당연한' 야근을 마치고 택시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집을 향하다 문득 저런 생각을 해버렸다. 지금 와서 보니 어머니께 죄송함을 선사할 미친 생각이었지만 그땐 그만큼 힘들었구나, 싶다. 그거 하나 참지 못하냐고 말한다면 난 당신을 꼰대로 간주하도록 하겠다.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그날 택시 안에서 난 평소에 별로 듣지도 않는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의 후렴구를 흥얼거렸다.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수고했어 오늘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오늘도~"

 

두 번 나온 건 오타가 아니다. 신기하게도 내가 흥얼거리자마자 택시의 라디오에서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가 흘러나왔다. 놀라우면서도 마치 운명의 여신이 나를 콕 집어서 "너 슬프지? 난 다 알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눈물이 와-르칵 쏟아졌다.

 

'그래, 아무도 내 슬픔에 관심 없어. 내 슬픔은 내가 책임지자. 나가자. 퇴사하자.'

 

퇴사에 대한 확고한 생각은 최초에 택시 안에서 굳혀졌고 그렇게 나는 퇴직금 몇 푼과 한재원이라는 이름 달랑 두 개를 들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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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에 계속

2장. 당근마켓 최종 면접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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