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연령별 타겟팅에 집착하십니까?
- 한눈에 보는 핵심요약
- AI가 판단과 업무를 대신하는 시대, 인간의 정체성은 직함·나이 같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로 재정의되고 있다. 좋아함이 곧 나를 설명하고, 관심사가 커뮤니티와 소속감의 기반이 된다.
AI가 일과 판단을 대신하는 시대, 인간에게 남은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다. AI는 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무엇에 끌리고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는지는 대신 결정해 주지 못한다. 지금의 정체성은 직함이나 나이가 아니라, ‘좋아함’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일상 속에 들어온 AI가 던지는 새로운 질문
J는 2024년 8월, 마라톤을 시작했다. 평생 달려본 적도 없고, 운동을 꾸준히 해본 적도 없던 그는 러닝화와 양말, 운동복을 사고 코칭을 받으며 첫걸음을 뗐다. 처음으로 5km 마라톤에 도전해 완주했고, 메달을 따냈다. 이어 10km 마라톤도 완주했다. 지금은 샌프란시스코 하프 마라톤을 꿈꾼다. 마라톤 선수가 될 수도 없고, 대단한 기록을 세울 수도 없다. 목표는 오직 완주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실체성을 느낄 수 있는 취미와 여가 활동이 지금 각광받고 있다. 손과 발을 움직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아날로그 취미, 예컨대 러닝과 수영, 뜨개질과 필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대규모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야구장, 축제, 박람회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인간이 마치 AI에게 “너는 몸이 없지? 나는 몸이 있어서 직접 느낄 수 있어”라고 항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성취감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오직 나만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실체성이다.

AI가 대중화되면서 뜨개질, 필사 등 손과 발을 움직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아날로그 취미가 각광받고 있다.
AI 대중화의 서막이 올랐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AI 기술이 발전해 한 사람이 열 명의 일을 대신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AI 서비스에 접속해 과제와 업무를 함께 하고, 사주를 보고 상담을 받으며, 자신의 일상을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는 친구로 삼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AI 서비스는 친구가 되는 동시에 불안감을 일으킨다. ‘AI가 인간의 일을 모두 대신하면, 인간은 쓸모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불안 속에서 인간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일’, ‘나만의 것’, ‘나의 고유함’을 만들어가려 한다. 물론 인간의 노력은 AI의 노력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다. AI는 거의 모든 레퍼런스를 검토해 자기 것으로 만든다. 지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반면 한 개인이 참고할 수 있는 레퍼런스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인간은 ‘나’라는 한계 속에서, 나의 경험이라는 한 줌에서, 내 몸이라는 부족함으로,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콩알만 한 ‘내 것’을 만든다.
AI라는 시대의 축 속에서 ‘정체성’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인생의 관점에서 나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할까”. 이기적인 의미의 ‘나’가 아니라,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나’, 곧 나의 정체성에 대해 우리는 어느 때보다 깊이 고민하게 된다.
타인이 아닌, 스스로 정의하는 나의 정체성
과거의 정체성은 관계 속에서 정의되었다. 누구의 아버지, 어느 직장의 부장, 어떤 단체의 몇 기수…. 반면 지금의 정체성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로 정의된다.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덕질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다르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취향’이라는 말로 포장할 필요도 없다.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 내가 설레는 것,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 20대를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말하고 싶은 나의 적성이 곧 나를 설명한다.
호스피스 봉사를 하는 K는 말한다. “나는 역시 돌보는 걸 좋아해. 그게 내 적성이야.” Y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한다. “나는 스크린 중독이야. 어쩌면 스토리 중독일지도.” 스스로를 ‘입문주의자’라고 칭하는 S는 말한다. “나는 늘 새로운 것에 끌려. 그걸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지거든.” ‘좋아한다’는 것은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이다. AI가 부각시킨 인간의 정체성, 그리고 인간이 바꾼 정체성의 기준. 이제 나를 정의하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나’다.
정체성이 다 담지 못하는 시대와 세대
앞서 등장한 마라토너 J, 돌봄 적성의 K, 스토리 중독자 Y, 입문주의자 S의 나이는 모두 50~60대다. 이들을 ‘5060 시니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을 수 있을까? ‘시니어’라는 한 단어에 세대가 담고 있는 꿈과 적성, 기호와 관심사를 모두 담아낼 수 없다.
지금 한국의 50~60대는 대한민국에서 스마트폰을 가장 먼저 손에 쥔 세대다. 2010년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을 당시에 30~40대 초반이었던 이들은 디지털 리터러시와 경제력을 함께 갖춘 집단이었다. 1995년 초고속 인터넷망이 깔리고 웹 시대가 열렸을 때, 개인용 컴퓨터를 구매하고 포털 사이트 이메일을 가장 먼저 만든 이들 역시 당시 20~30대 초반이었던 지금의 5060 세대다.
AI를 능숙하게 활용하고 디지털 기기를 자유롭게 다루는 모습이 자연스럽지만, 우리는 여전히 5060 시니어라는 기표 속에서 ‘디지털 소외’를 연관 짓는다. 지금도 계속 사용되는 마케팅 타깃, 설문지와 각종 문서 속의 5060 시니어 혹은 5060 중장년층은 도대체 어느 시대, 어떤 사람들을 상정하고 있는 것일까? 본인도 아니고 주변의 누구도 아닌데, 우리는 여전히 5060을 나이 들고 은퇴한 사람, 디지털에서 멀어진 존재로 규정한다. 적어도 2026년 현재 시점에서 5060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특정 이미지로 고정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다.

현재 50~60대는 대한민국에서 스마트폰과 개인용 컴퓨터를 가장 먼저 사용한 세대로, 디지털 리터러시와 경제력을 함께 갖춘 집단이다.
커뮤니티성은 관심사에서 온다
커뮤니티성은 관심사에서 온다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범주화하고 타자화한다. ‘OO 세대’라는 표현이 그렇다. 얼마를 버는 세대, 어떤 말을 쓰는 세대라고 규정하는 행위는 이해라기보다 폭력에 가깝다. 반면 긍정적 집단 정체성의 사례도 있다. ‘무도 키즈’다. 무도 키즈라는 정체성의 핵심은 ‘자발적 선언’에 있다. 누군가 규정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는 무도 키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도 키즈는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보고 자란 세대이자, 그 프로그램이 남긴 사회적 DNA(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불완전함을 숨기지 않는 용기, 유쾌한 도전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감각)를 내면화한 사람들이다. 한때 함께 소비한 콘텐츠가 오늘의 정체성이 된 사례다.
이는 정체성의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과거에는 나이나 출생지·학교·직업 같은 외적 조건이 정체성을 규정했다면, 이제는 자신이 선택하고 소비한 콘텐츠와 관심사가 정체성의 핵심이 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문장 속 ‘무엇’에 콘텐츠가 작동하는 이유다.
커뮤니티 역시 마찬가지다. 동질감을 강화하는 힘은 나이가 아니라 관심사에서 나온다. 과거에는 같은 나이, 같은 띠가 커뮤니티의 기준이었다. 나이에 따른 서열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심사를 중심으로 모인 커뮤니티에서는 서열의 필요가 줄어든다. ‘OO 님’이라는 호칭 아래 느슨한 연대와 존중이 작동한다. 동네 도서관의 아날로그 음악 공간, 야구장, 축제가 그 대표적 사례다. 굳이 서로를 알아가지 않아도, 회비를 내지 않아도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정체성과 소속감이 확인된다.
우리 모두는 나이와 라이프 스테이지를 갖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주민등록증에 담긴 정보가 아니라 기호와 관심사에 있다. 새해에는 각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정하고, 타인을 섣불리 규정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1 ‘무도 키즈’는 함께 소비한 콘텐츠가 추억을 넘어 오늘의 가치관과 정체성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다. ©MBC
2 축제를 즐기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같은 감정과 취향을 선택한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하나의 커뮤니티로 이어지는 경험이다.
글. 박현영(생활변화관측소 소장·대표)
ℹ️ 이 글은 미래에셋증권 매거진에서 발행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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