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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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눈에 보는 핵심요약
  • 시대마다 반도체의 주도권은 끊임없이 이동해 왔다. 글로벌 공급망을 뒤흔든 일련의 사건들과 새로운 강자들의 등장은 반도체 판을 새롭게 짜고 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떤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세계 반도체 시장의 판도가 흔들리고 있다. 30년 넘게 지켜온 D램 1위 자리가 바뀌고, 공급망은 경제·안보 이슈로 재편되고 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넘어 첨단 반도체 강국을 향해 추격 속도를 높이고 있으며, 한국은 인력난과 자급 경쟁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은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다시 확인해야 할 시점이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얼마 전 세계 반도체 시장조사 기관이 흥미로운 발표를 했다. 한국 기업이 30년 넘게 지켜온 D램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다른 한국 기업이 새롭게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오랜 기간 자리를 지켜온 기업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크겠지만, 한편으로는 국내에서 치열한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메모리 반도체의 저력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반도체는 1950년대 미국에서 처음 발명된 뒤 전자계산기, 가전제품, PC 보급과 함께 빠르게 성장해왔다. 연평균 10%라는 놀라운 성장률 속에 수많은 강자가 등장했고, 1위 자리는 늘 바뀌어왔다. 초기에는 군수용과 계산기로 시장을 주도하던 기업이 있었고, 1970년대 메모리 반도체의 부상, 1980년대 일본 기업의 D램 강세, 1990년대 PC와 CPU 시장의 성장, 최근 AI 반도체의 부상까지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은 끊임없이 이동해왔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이 경쟁하던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어 후발 주자였음에도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력을 쌓아왔다. 이번 변화도 반도체 산업에서는 언제든 승자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반도체 자급 경쟁, 공급망 재편의 서막

 

반도체는 처음에는 군사용으로 개발했지만, 점차 전자 기기에 활용하며 쓰임새가 크게 확장됐다. 첨단 기술이 집약된 만큼 부가가치가 높아 기술력이 일정 수준 이상인 국가나 기업이라면 누구나 확보하고자 하는 전략 품목이다. 그러나 제조 기술이 빠르게 고도화되고 설비투자가 막대한 탓에 많은 국가와 기업은 직접 생산보다 경쟁력 있는 업체에서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방식을 택해왔다. 이에 따라 반도체 제조업계는 공정별로 강점을 보유한 국가와 기업이 모여 글로벌 공급망을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최근 반도체가 경제·안보의 핵심 자원으로 부상하면서 공급망 재편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 흐름을 먼저 흔든 것은 중국이었다. WTO 가입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성장하면서 반도체 수요가 급증했지만, 생산 기반이 취약해 수입 의존도가 높았다. 무역 적자와 안보 우려가 커지자 중국은 자급화를 목표로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이에 미국은 무역 분쟁을 넘어 기술 패권 경쟁으로 맞서며 견제를 강화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글로벌 공급난이 발생하자 각국은 반도체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했다. 저렴한 조달보다 안정적 공급망을 확보하는 게 더 중요해지면서 주요국은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자국 생산 역량을 키우기 위한 지원책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에 큰 도전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이끌어왔지만, 주요국이 자급률을 높이면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반도체 산업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생산량의 90%를 해외에 수출하는 만큼 경쟁력을 잃지 않으려면 변화에 철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SMIC는 중국 정부의 반도체 굴기 전략과 자급화, 기술 독립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AFP

 

 

 

중국, 세계의 공장에서 반도체 강국으로

 

앞서 말했듯 글로벌 공급망 재편 흐름 속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변수는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산업화는 2001년 WTO 가입을 전후로 뚜렷하게 나뉜다. 가입 이전에는 농업 중심이었지만, 이후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세계의 공장으로 떠올랐다. 전 세계 전기·전자 기기의 절반 이상이 중국에서 생산되면서 중국은 최대 반도체 소비국이 됐지만, 자국 생산기술력이 부족해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했다.

 

2000년대 후반에는 반도체 수입액이 원유를 추월하며 무역수지에 가장 큰 부담이 됐다. 이에 중국은 2009년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자국 생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중국 정부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글로벌 기업 인수·합병M&A으로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려 했지만, 미국이 이를 견제하면서 전략은 한계에 부딪혔다.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인 장비의 핵심 기술이 대부분 미국에 있다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미국은 자국뿐 아니라 동맹국에도 중국으로의 장비 수출을 제한해 중국의 고성능 반도체 생산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자급률을 조금씩 높여왔다. 메모리 반도체 등 진입 장벽이 높은 분야에서도 생산을 확대했고, 첨단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파운드리를 가동하며 기술 격차를 좁히고 있다. 지금의 추격 속도라면 머지않아 중국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한국 반도체의 기회와 숙제

 

한국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반도체 산업이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메모리 반도체를 주력으로 성장해왔다. 이 과정에서 반도체 산업이 대기업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정부의 연구·인력 지원도 한동안 크게 줄어 들었다. 그 결과 대학의 반도체 전공 교수와 인력 양성 기반이 약해지면서 2010년대 말부터 전문 인력 부족 문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내부 요인에 더해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중국의 빠른 추격, 최근의 불확실한 대외 변수까지 더해지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은 기술 경쟁력과 시장점유율 모두 녹록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낙담하기엔 이르다.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안정적 산업 생태계를 다시 구축할 기회와 역량이 이미 충분하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흐름은 피할 수 없지만, 주요국들이 경제성을 무시한 자국 생산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기회는 다시 올 것이며, 그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현재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K-반도체 발전 전략’과 ‘메가 클러스터 조성 전략’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준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단순한 제조 경쟁력에 머무르지 않고 설계·장비·소재까지 밸류 체인을 강화해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또 지역별로 흩어진 생산·연구 인프라를 연계해 시너지를 내고, 인력 양성과 연구 개발R&D 투자를 종합적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경쟁국보다 한발 앞서 대응 전략을 세운 것은 긍정적이지만, 최근 미국과 유럽이 전례 없는 수준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내놓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 정책은 위기의식이 다소 낮고, 추진 속도도 더디다는 지적이 있다.

 

해외 주요국은 기업 유치와 첨단 공정 투자에 과감히 자금을 투입하고, 핵심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맞춤형 교육과 규제 완화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정책 발표 이후 민관 간 조율이 길어지고, 현장과 지원 체계 간의 간극이 커 산업계에서는 체감 속도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기술 변화 주기가 빠른 만큼 정부 지원은 계획에 머물지 않고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신속하게 전달돼야 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전문 인력을 충분히 양성하려면 대학과 연구 기관의 교육과정을 현실에 맞게 개편하고, 산업계와 연계해 현장형 인재를 지속적으로 배출해야 한다. 기업도 정부 정책에만 기대서는 안된다. 시장 흐름을 선제적으로 읽고, AI 반도체·차세대 메모리·첨단 파운드리 같은 신성장 분야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해야 추격자들을 따돌릴 수 있다. 결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과 기업의 민첩한 대응이 함께 이뤄져야 K-반도체가 흔들리지 않는 경쟁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글. 김양팽(KIET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 경제안보·통상전략연구실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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