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에게 배울 건지, 무시할 건지
패션이 충만한 한국의 가을 산
가을산은 단풍뿐 아니라 알록달록한 등산복들로 등산로에도 화려함이 가득합니다. 지난 주말, 지리산 등산을 다녀왔는데요. 천왕봉을 목표로 대원사에서 시작해 치밭목대피소에서 1박을 했습니다. 국립공원 대피소에는 취사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대피소 예약자가 아니더라도 등산객은 이곳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거나 또는 궂은 날씨를 피해 잠시 쉬어가기도 하지요. 대원사 코스는 지리산의 다른 코스들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등반하거나 오르는 코스는 아닌지라 치밭목대피소는 지리산 대피소 중에서도 규모가 작습니다. 좁은 취사장 안에서는 삼겹살을 구운 연기로 앞이 보이지 않는 정도였는데요. 어려운 코스를 올라가거나 내려온 등산객들은 이 대피소에서 이런 보상의 식사를 당연히 생각한달까요? 대피소 벽에는 음주 금지라고 적혀 있었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죠. 한쪽에서는 홍어를 꺼내 거나하게 한 상을 먹는 무리도 있습니다. 이 고기 연기 자욱한 곳에 남녀 두 젊은이들이 바닥에 앉아 에너지 바를 씹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연기를 피하느라 바닥에 앉아 있는 듯싶었습니다. 바닥에 처연하게 앉아 초콜릿 같은 걸 먹고 있는 젊은이들이 안타까웠는지 취사장의 사람들은 연신 고기를 권합니다만 두 젊은이들은 극구 사양하고 말더군요.
지리산 치밭목대피소. 올라오는 동안 비바람이 심했는데 겨우 가신 상황. 왼쪽에 보이는 것이 너구리도 잡는 취사장입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 남녀는 각각 아크테릭스 윈드브레이커와 살로몬 트레킹화를 신고 카멜백의 트레일러닝용 베스트를 메고 있었습니다. 옆에는 레키 사의 초경량 트레킹 폴도 보였고요. 소위 요즘 유행하는 첨단의 등산 기어와 의류를 다 착용하고 있었죠. 가득한 연기를 피해 취사장을 나온 저를 따라 나온 두 젊은이들은 대원사 쪽에서 올라왔냐며 얼마나 걸렸느냐 제게 물어보더군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친절하게 본인들의 등반 여정을 알려줬습니다. 화대종주(46km) 트레일러닝을 하고 있고, 새벽 2시에 출발해서 대원사까지 내려가는 게 목표라고 했습니다. 이미 12시간 넘게 산을 달리고 있는 셈입니다. 다섯 명이 시작했는데 두 명만 지금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부연 설명도 해줍니다. 그때 시간은 이미 오후 3시가 넘었고 그 시각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어서 깊은 골짜기로 된 대원사 길은 곧 어두워지고 더 험난할 것입니다. 곧 어두워질 텐데 길이 험해서 조심해야겠다 말해주었죠. 어두워지기 전에 뛰어 내려갈 수 있다고 여자는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아 네. 화이팅. 속으로 저는 말했죠.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트레일러닝입니다. 진입층은 2030세대가 압도적이나 대회에 나가보면 사실 오랫동안 이 운동을 해 온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가득합니다 <출처 - 울주트레일나인피크대회>
높은 산의 대피소에서 사람들은 일종의 동지 의식이 있습니다. 본인과 같은 고생을 했고 또는 같은 고생을 할 사람들이라는 의식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젊은이들은 취사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이야기에 어찌 보면 조금 냉담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는데요. 왜 굳이 저에게는 말을 걸었을까요? 가정해 보건대, 마침 그들과 저는 똑같은 윈드브레이커를 입고 있었습니다. 제 등산화도, 제가 들고 있던 티타늄 식기도 아마 그들은 무슨 메이커이고 어떤 제품인지 알만 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그 취사장에서 그 젊은이들을 제외하곤 가장 젊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저도 분명 아저씨입니다만 삼겹살에 홍어를 먹던 아저씨들과는 연배 차이가 있어 보였고 그 연기 가득한 취사장에 등을 돌린, 요컨대 동류의 사람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요.
험난한
지리산에서 첨단의 의류들을 장착하고 최신의 유행인 트레일 러닝을 하는 그 젊은이들은 이 대피소에서 다른 부류처럼 보였습니다. 삼겹살을 권하거나 손바닥만 한 배낭에 뭘 집어넣냐 비화식을 먹고 힘이 나겠냐 하는 아저씨들의 관심과 질문은 마치 한강에서
천만 원짜리 로드바이크를 타는 사람에게 '기어가 몇 단이냐' 물어보는
아저씨들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대 차이 아니 그 이상의 단절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날씨가 궂어 대청봉 일출 산행은 못 하고 대피소에서
일출을 볼 때쯤 예의, 그 홍어 아저씨 무리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게 되었습니다(저는 낯선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걸 좋아합니다). 그날은 마침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쳤고 구름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저기 해가 떠 있는데 이 골짜기에 먹구름이 뒤덮는 걷잡을
수 없는 날씨도 이상할 게 없는 듯 보였습니다. 지리산 어디 어디에 상고대는 어떤 바람과 온도에 지워질
것이고 어디는 얼어붙어 버릴 것이라던지 하는 연륜으로 채워진 지리산 등반의 지혜가 가득 오고 갔습니다. 삼십
년 전부터 매년 3,4회씩 지리산을 올랐던 분들이더군요.
12시간은 지리산을 달리는 체력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임에도 치밭목에서 대원사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워 누군가에게
물어볼 경험의 수준이라면 이 아저씨들에게 얻을 수 있는 지혜는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그들이 정말 내려가는 시간을 몰라 제게 물어본 게 아니라 단지 자부심 가득한 행적을 이야기하면서 동류에게 말을 건네보려고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삼십 년간 지리산을 달렸을 리는 없겠죠.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설령
이 아저씨들이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한들 그 젊은이들은 이 아저씨들과 소통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이 아저씨들도 그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었을지 역시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