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NE의 매거진

마케터의 일상, 브랜더의 이상

STONE

2019.05.0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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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없는 이론은 공허하고, 이론 없는 경험은 맹목적이다”

– 임마누엘 칸트 –

 

우리는 매일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때론 힘들고 지쳐도 일상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작든 크든 자기만의 이상을 품고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을 견뎌내는 힘 또한 곧 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일상과 이상. 이 둘은 물과 소금처럼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첫 직장이었던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펌에서 주로 다루었던 주제는 브랜드가 가져야 할 ‘이상’이었습니다. 경쟁 시장 내에서 기업이 가지는 강점을 토대로 브랜드가 갖춰야 할 핵심 가치를 정립하고 브랜드의 비전을 상정하는 일. 멋지지 않습니까. 흠. 그런데 한 해 두 해가 넘어갈수록 그 일은 어쩐지 ‘공허’해져 갔습니다. 우리가 제시한 브랜드의 ‘이상’은 클라이언트의 책상 서랍 속에 간직된 채 빛을 보기 힘든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 입사한 두 번째 직장인 현대카드에서는 마케팅의 ‘일상’을 여러 각도로 경험해 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하나의 카드 상품이 소비자의 손에 쥐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처의 노력들이 필요한지, 브랜드의 이상이 파고들 수 없는 마케터의 ‘일상’이 얼마나 고된지. 컨설팅 펌이 가져오는 한 두 단어의 ‘키워드’가 얼마나 공허할 수 있는지. 비로소 왜 두꺼운 브랜드 컨설팅 보고서가 내 책상 서랍에 무기한 전세를 놓게 되는지 알게 되었죠. 그러면서도 여전히 답답함은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마케터로서의 일상이 브랜드가 가고자 하는 큰 흐름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지 늘 그 답에 목말랐습니다.

 

 

브랜더로서, 그리고 마케터로서의 삶을 모두 경험하고 다시 에이전시 비즈니스로 돌아온 지금은 브랜드의 이상만을 좇거나 마케터의 일상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닌, 브랜드의 이상과 마케터의 일상이 서로 물 흐르듯 서로 섞이고 서로를 존중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브랜드가 성장할 수 있음을 이해합니다. 브랜드의 이상만을 외치면서 ‘왜 이상을 실현하는 마케팅을 못하죠?’라고 채근하지 않고, 마케터의 일상을 외치면서 ‘왜 쓸데없는 이상만 늘어놓죠?’ 라고 따지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예쁜 노트가 아닌,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 몰스킨

모든 작가들에게는 습작 노트가 있죠. 완성된 하나의 책보다 습작처럼 끄적거렸던 노트가 경매에서 고가에 팔리는 것을 보면 작가들이 하나의 책을 만들기 위해 떠올렸던 생각들, 상상들의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작가는 아닐지라도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하나의 책입니다. 저마다의 삶의 이야기가 있죠.

 

 

[피카소,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브랜드, 몰스킨]

 

몰스킨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등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사용한 전설적인 노트북을 소생시켜 탄생한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몰스킨의 창립자는 이렇게 강력한 스토리와 연계해 빈 노트와 다이어리의 몰스킨을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unwritten book)’ 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단순히 노트의 디자인을 보고 고르는 아이템이 아닌, 당신의 인생을 담을 책이라는 정의를 통해 자세를 고쳐 앉고 브랜드를 보게 만들었죠. 만약 몰스킨이 이러한 브랜드의 이상을 규정하는 데 그쳤다면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임을 현실화한 ISBN(국제표준도서번호)가 기재된 몰스킨 노트]

중요한 것은 실제로 사람들이 몰스킨을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실행이었습니다. 몰스킨의 마케터들은 이러한 브랜드의 이상을 일상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몰스킨 노트 판매 접점을 ‘문구점’이 아닌 ‘서점’으로 향합니다. 각자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책’의 카테고리이니 말이죠. 마케터들의 노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노트들과는 다르게 몰스킨 노트에는 ISBN (International Standard Book Number), 즉 국제 표준 도서 번호가 부여됩니다. 몰스킨의 노트와 다이어리들은 new edition이 출시될 때마다 새로운 ISBN을 부여받죠. 브랜드의 이상을 기가 막히게 마케터의 일상으로 전환시킨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의류 브랜드가 아닌 액티비스트 컴퍼니, 파타고니아

 

[“이 자켓을 사지 마세요” 라는 역설적인 캠페인으로 환경에 대한 기업의 진정성을 알린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는 “이 자켓을 사지 마세요. (Don’t buy this jacket.)” 라는 역설적인 캠페인으로 널리 알려진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입니다. 파타고니아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어렴풋이 이 브랜드가 ‘환경’과 ‘지속가능성’에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은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파타고니아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기업의 미션도 “We are in business to save our home planet.” 입니다.

 

지속가능성과 환경보호를 외치는 기업들은 많습니다. ‘지속가능성 보고서’라는 것이 IR Report의 없어서는 안 될 아젠다가 되어버린 것처럼 기업들은 저마다 앞다투어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외칩니다. 하지만 그러한 브랜드의 이상을 마케터의 일상으로까지 실천하고 있는 기업들은 많지 않습니다.

 

파타고니아는 의류 생산의 프로세스와 결과물 차원만이 아닌 인재 채용과 일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브랜드의 이상을 현실화합니다. 동종업계 평균 퇴사율이 17%인데 반해, 파타고니아의 퇴사율은 4%에 그칩니다. 매년 선정되는 Great Place to Work (GPW)의 단골 기업이기도 합니다. 파타고니아가 채용할 때 중점적으로 보는 것은 무엇일까요?

 

 

[환경보호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파타고니아 직원들]

 

“저는 이력서를 받으면 순서대로 읽지 않습니다. 보통 이름, 학력, 직장경험 등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죠? 그리고 제일 밑에는 개인의 관심사(interest)와 사회활동(activities)이 중요하지 않은 듯 적혀있을 겁니다. 저는 그 제일 밑에 있는 것부터 읽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우리가 찾는 인재가 아닌지 확인할 수 있거든요.”     – 파타고니아 총괄 HR 딘 카터

 

그 이유는 파타고니아가 지향하는 ‘자연과의 연결’, ‘환경위기의 해결’ 등과 같은 핵심가치와 얼마나 가까운지는 지원자가 외부활동(outdoor)을 좋아하는지, 환경과 관련된 자원활동을 해왔는지, 환경적 가치를 보존하고 옹호하는 다양한 여정을 거쳐왔는지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무실과 실내에서 열심히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거나, 쇼핑을 좋아하거나, 착실하게 멋지게 성장한 인재들은 파타고니아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합니다. 

 

 

[파타고니아에서 런칭한 아웃도어 액티비티용 오가닉 푸드 라인, Patagonia Provisions]

 

이렇게 브랜드의 이상이 마케터의 일상과 물 흐르듯 연결되어 있는 파타고니아가 환경과 관련된 지속적인 콘텐츠 마케팅을 하고 (the Cleanest Line), 아웃도어 액티비티 시 요긴할 오가닉 푸드 제품라인 (Patagonia Provisions)을 내놓았을 때 더욱 더 브랜드의 이상이 공고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것입니다.

 

 

 

[환경,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파타고니아의 웹매거진 The Cleanest Line] (사진 클릭시 이동)

 

지속가능성 리포트 내의 몇 줄의 의미가 아닌, 비즈니스의 존재 이유 자체가 함께 살아가는 지구와 환경을 보호하는 일인 파타고니아가 주장하는 “The Activist Company”는 브랜드의 이상과 마케터의 일상이 명확한 공감의 지점을 가진 채 커다란 긍정의 눈덩이를 키워가는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상과 일상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진동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겠지요.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많은 브랜드들이 처한 문제의 핵심은 어쩌면  단순히 비즈니스 모델이 잘못되어서, 혹은 경쟁자가 너무 많아서 같은 현실적인 이유보다는 브랜드의 이상과 이를 현실화해야하는 마케터의 일상이 서로를 존중하고 공감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브랜더들에게는 브랜드가 실현하고 만들어내야 할 ‘마케터의 일상’이 품은 지난함과 책임감을. 마케터들에게는 브랜드가 진정으로 꿈꾸고 키워가야 할 ‘이상’의 두근거림을. 브랜드의 ‘의미’와 마케팅의 ‘감각’이 하나의 큰 흐름 속에서 서로 교감하며 물살을 탈 때, 그 브랜드는 경쟁의 축에서 싸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브랜드 스스로의 세계를 키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김혜원

Brand Creation Group Strategy Director

heywon@stoneb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