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리더십

200만원 들여 이직한 썰

주드

2022.05.1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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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 여성의 이직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의 이직을 희망했기에 더더욱 힘들었다. 경력도, 연봉도 스타트업에서 원하는 조건이 아니었다. 서류에서 너무 많이 탈락했다. 떨어진 곳이 2-30 군데는 됐을 것이다. 운 좋게 규모가 큰 스타트업 한 곳 면접을 볼 수 있었지만 그 역시도 탈락했다. "어떤 스타일의 상사와 일하기 힘든가요?"라는 질문에 잘못 걸렸다. 에둘러 말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현 직장 상사 험담을 하고 말았다. 하이킥 감 흑역사만 생성하고 나왔다. 서류도 면접도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면접도 보면 볼수록 는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잇따른 서류 탈락으로 면접 기회 잡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류를 합격했을 때 면접도 한 번에 붙어버려야겠다고 전략을 세웠다. 지금 생각해도 똑똑한 전술이었다. 모의면접이라도 보겠다는 심산으로 면접 학원을 찾기 시작했다. 강남의 한 스피치 학원을 찾아갔다. 그렇게 상담 실장과의 만남이 성사됐다. 

 

면접 학원은 역시나 비싼 패키지를 추천했다. 그중 끝판왕인 1:1 과외를 제일 강추했다. 상담 실장은 맞춤형이라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2시간X5회에 100만 원이었다. 비쌌다. 누군가는 경력직 면접에 과외도 기함할 노릇이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비싸기까지 하니 과하고 또 과하다고 생각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PT, 필라테스 1:1 개인 레슨으로 1:1의 효과를 몸소 체험했던 터라 고민이 됐다. 어떻게든 현 회사를 탈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꺼이 100만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수업은 그다음 주부터 시작됐다. 첫 시간부터 미소를 장착하는 연습이 시작됐다. 평소 웃을 일이 없었던 내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다. "미소를 항상 머금되 입과 눈 둘 중 하나만 웃지 않고 모두 웃어야 해요.", "입꼬리도 한쪽만 올리지 않고 양쪽 다 올리세요. 썩소 같아요." 선생님이 이렇게 미소를 강조한 것은 웃지 않고 대답을 하면 회사에서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웃는 게 중요한 일인가. 안 웃어도 힘든 것을 꾹 참고 이 악물고 버티면 안 되는 것일까? 웃을 일이 없는 회사에서 웃기 위해 100만 원을 투자하는 이 상황이 더 웃길 뿐이었다.

 

면접 학원에서 교육받은 내용 중 외적 내용 교정의 비중이 컸다. 회사는 겉치레가 중요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소 탑재 외에도 교정받을 것은 많았다. 풀어헤친 머리는 깔끔하지 않으니 묶어야 했고 사무직 10년을 하며 얻게 된 굽은 어깨도 펴야 했다. 복식호흡, 발성, 발음까지도 코칭받았다. 면접복장도 새로 사야 했다. 보통유관순이라 불리는 면접 복장이었다. 내 옷은 신입사원 때 이후 옷장에 10년간 묵혀두었다. 주름지고 광택이 나면서 어벙한 핏의 유관순은 더 이상 경력직에게 먹히지 않았다. 좀 더 핏 되고 광택 없이 쌈빡해 보이는 옷을 사기 위해 백화점을 갔다. 100만 원을 투자했다. 과외비와 합쳐서 200만 원이었다. 

 

물론 외적인 것만 코치를 받은 것은 아니다. 답변 내용도 대수술을 받았다. 답변 하나 하나에 회사가 원하는 인재인 것처럼 티 안 나게 숨겨두었다. 쉬는 날에는 등산이나 수영을 하러 간다고 말하며 나의 활동성과 부지런함을 넌지시 던지는 식이었다. 답을 말하는 방식도 코치받았다. 면접관에게 두괄식으로 떠먹여 줘야 했다. 주장-설명-재주장의주장 샌드위치를 한입 거리로 만들어줘야 했다. 샌드위치 기법은 유명한 면접 답변 방식이다. 이론 수업의 핵심은 면접관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론 이후는 실습이었다. 외적인 부분, 답변 성형을 거친 뒤 모의면접의 연속이었다. 모의면접, 동영상 촬영, 피드백, 교정이 반복됐다. 나의 진짜 모습 중 회사에 적응을 잘할 것 같은 선택적 답변만 늘어놓았다. 겉모습 또한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외모와 복장, 애티튜드를 장착했다. 이렇게 회사형 인간으로 치장한 결과는 확실했다. 어렵게 잡은 1회의 면접 기회에서 한 번에 합격할 수 있었다. 왜 면접에서 웃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회사에서는 솔직하면 안 되는가. 왜 회사가 원하는 인재인 것처럼 나를 꾸며야 하는가. 회사는 이번에도 꾸며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곳이 회사라고 답했다. 힙합을 소환하게 되는 지점이다.

 

힙합에서 여성래퍼들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여성 래퍼들은 성공하려고 정통 랩을 연마해 도전장을 냈다. 그것은 기존의 문법이고 남자의 문법이었다. 랩은 생물학적으로 흑인 남자들로부터 시작했다. 성공한 흑인 여성 래퍼의 수도 적은 힙합씬에서 여성, 특히 한국 여성으로서 정통 랩을 소화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처럼 랩을 하려는 여성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윤미래 같은 유일무이한 여성 래퍼가 나왔다. 발성과 톤이 사기였다. 윤미래는 기존 힙합 문법에 충실하게 녹아들었다. '여자도 남자 같은 랩을 할 수 있구나.'라는 희망도 줬다. 그러나 항상 비교가 되는, 뛰어넘어야 되는 벽도 됐다. 여성 래퍼가 등장하면 항상 윤미래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벽을 뛰어넘은 여성 래퍼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 래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재키와이는 윤미래처럼 붐뱁 비트 위에서 놀려고 하지 않는다. 기계음과 혼연일체가 됐다. 통이 넓은 바지도, 레게 머리도 하지 않는다. 핑크색, 노란색, 회색 등 다양한 색을 머리카락이 바스러질 때까지 머리에 얹었다. 양갈래 삐삐머리에 치마 또한 기존의 힙합 가수로 보기는 어렵다. 확실히 재키와이에서는 윤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재키와이는 재키와이의 모습과 방식으로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스월비, 릴체리 등 다양한 개성의 여성 래퍼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는 다들 각자의 모습이 있다. ‘가짜로 사랑받을 바에 나로 살고 악당을 하겠다’ (스윙스 <악역>)는 곳이 힙합임이 증명되는 사례들이다. 결국 나만의 색깔이 해답이었다.

  

윤미래의 길을 가지 않은 여성 래퍼들에서 내 길과 내 모습을 상상한다. 회사에 둥글둥글하게 적응하는 직원을 이상향으로 두고 나를 끼워 맞추는 모습을 지워본다. 그리고 나라는 새로운 모델을 그린다. 나는 회사에서 가지 않은 길을 가면서 내 색깔을 낸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낸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기획안과 보고서를 쓰는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회사에 나를 맞추기보다 내 색깔을 지키면서 회사가 원하는 것과 타협한다는 태도, 그것이 나를 출근하게 하는 힘이 될 것 같다. 회사에 좀 더 오래 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힙합이 부럽다.

회사는 힙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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