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곧 법'인 세상, 눈치 빠른 중견국이 뜬다
- 한눈에 보는 핵심요약
- 국제 질서는 힘과 협상, 블록 간 이해관계가 함께 작동하는 다중축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공급망과 자본의 흐름 역시 안정성과 전략산업 중심으로 재편되며, 세계는 연결의 허브가 되는 국가와 지역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질서는 조용히 방향을 바꾸는 중이다. 규칙과 규범이 이끌던 세계는 이제 힘과 협상, 그리고 서로 다른 기준이 함께 작동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이런 변화는 단순한 균열이라기보다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과정에 가깝다.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이 바뀌는지보다 그 변화가 어떤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읽는 일이다.
포스트 패권 시대, 바뀌는 글로벌 질서
최근 국제 질서는 눈에 띄게 방향을 바꾸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전방위적 관세정책과 보다 직접적인 힘의 활용이 자리한다. 이른바 트럼프 2.0 국가안보전략NSS은 앞으로 국제 질서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신호로 읽힌다. 규칙과 규범에 기반해 작동해 온 질서는 점차 힘의 균형과 협상 중심의 경쟁 구조로 이동하는 흐름이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인권·다자주의처럼 미국 외교를 지탱해 온 가치들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조정되고, 국가이익과 국력 및 협상 성과가 보다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규칙 중심의 질서에 더해 ‘억지와 협상’이 병행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으며, 외교 역시 가치보다는 실질적 성과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무게가 옮겨가고 있다. 이에 따라 동맹과 협력 관계도 가치 공유에 더해 기여와 역할 측면에서 함께 평가되는 흐름이 나타난다. 이는 기존 질서가 사라진다기보다 작동 방식이 달라지는 과정에 가깝다.
세계 경제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세계화의 속도는 한층 완만해지고, 경제는 점차 블록 단위로 파편화되는 모습이다. 자유무역과 함께 경제 안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공급망 역시 효율성에 더해 안정성과 신뢰를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그 결과 세계화는 이전과 같은 확장 국면보다는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zation’이라는 완만한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는 트럼프 행정부의 독특한 정책 접근과도 맞닿아 있다. 장기적 안정성보다는 단기적 성과와 협상력을 중시하며, 관세나 제재 및 환율 압박 같은 강한 수단을 먼저 활용한 뒤 협상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규칙보다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통해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관세 역시 단순한 정책 수단을 넘어 협상의 유연한 카드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접근은 단기적으로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 정책 추진력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동시에 시장에는 일정 수준의 변동성과 긴장을 동반하기도 한다. 실제로 정책 신호 하나에도 시장이 빠르게 반응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흐름이 이어질 경우 글로벌 공급망과 투자 환경 역시 보다 신중하게 재조정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국제 제도와 협력 구조 또한 이에 맞춰 점진적 변화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나 제재, 환율 압박이라는 강한 수단을 먼저 활용한 뒤 협상을 이어가는 독특한 방식을 보여준다. ©한경DB
멀티플렉스 국제 질서의 도래
많은 국제정치 전문가는 최근의 대외 정책 변화를 국제 질서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로 본다. 트럼프 행정부의 움직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져 온 미국 중심의 규칙 기반 질서가 점차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를 두고 미국 중심 질서의 종언으로 단정하기보다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시각도 함께 존재한다. 실제로 미국의 힘은 여러 지표에서 확인된다. 2024년 기준 군사비는 약 9,970억 달러약 1,481조 3,426억 원로 전 세계의 37% 수준이며, 2위인 중국보다 크게 앞선다. 경제 규모 역시 세계 최대 수준이고, 기술과 연구 개발 투자에서도 여전히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러한 흐름은 국제 질서가 단순히 약화되기보다 작동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의 역할도 ‘질서를 유지하는 중심’에서 ‘자국 이익을 중심으로 운용하는 주체’로 점차 이동하는 모습이다. 과거처럼 규범과 제도를 앞세우기보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압박과 협상을 병행하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앞으로의 국제 질서는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축이 동시에 작동하는 멀티플렉스 구조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단일 규칙이나 단일 리더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 다양한 국가와 지역이 각자의 방식으로 질서 형성에 참여하는 형태다. 하나의 스크린이 아니라 여러 개의 스크린이 동시에 상영되듯 서로 다른 규범과 제도, 질서가 함께 작동하는 모습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보편주의보다 다원주의가 보다 강조되는 흐름이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곳곳에서 나타난다. 미·중 간 기술 경쟁, 전략산업의 블록화, 지역별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세계는 하나의 축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로 바뀌고 있다.
이 다중 구조는 몇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지정학적으로는 인도·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미·중 경쟁, 유럽의 재무장 움직임,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신흥 개발도상국의 부상이 함께 나타난다. 둘째, 기술 영역에서는 인공지능·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산업을 둘러싼 경쟁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에 더해 유럽, 그리고 한국·일본·인도 같은 중견국도 각자의 전략을 모색하는 흐름이다. 셋째는 공급망이다. 최근의 정책 변화는 자국 중심의 생산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를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움직임과 맞물린다. 팬데믹을 거치며 공급망 안정성의 중요성이 커졌고, 주요 국가들은 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연결 구조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이처럼 세계는 하나의 질서가 작동하던 구조에서 여러 질서가 동시에 움직이는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

자국 우선주의와 다중축 질서가 교차하는 2025 G7 캐내내스키스 정상회의 현장 ©Government of Canada
다중축 세계로 전환
다중축 세계로 전환하는 것은 단순한 국제정치 질서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자본이 움직이는 방식과 기회의 지형을 다시 그리는 구조적 변화이기도 하다. 지정학과 지경학의 변화는 결국 돈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이제 중요한 과제는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보다 세계가 어떻게 나뉘고 다시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떤 기회가 만들어지는지를 읽는 일이 되고 있다.
최근의 지정학적 이슈들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크라이나·가자 지구·베네수엘라·이란 등 주요 지역에서 이어지는 긴장은 단순한 외교적 갈등을 넘어 국제 질서 전반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동시에 이는 강대국이 어떤 방식으로 힘을 활용하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금융시장은 이러한 상황을 ‘글로벌 리스크 이벤트’로 인식하며 빠르게 반응한다. 그 결과 투자자의 위험 회피 성향이 높아지는, 이른바 ‘리스크 오프Risk-Off’ 흐름이 강화된다. 이는 주식이나 고수익 채권 같은 위험 자산에서 국채·금·현금 같은 안전 자산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환경에서는 자본의 움직임에도 몇 가지 공통된 방향이 나타난다. 첫째, 자금은 미래 전략산업으로 향한다. 반도체·AI 인프라·에너지·방산·원전·우주 등 국가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산업의 중요성이 한층 커지고 있다. 둘째, 단기 수익보다 안정적 장기 투자에 대한 선호가 높아진다. 자본은 단순히 비용이 낮은 곳이 아니라, 안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환경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한국·싱가포르·인도·캐나다·UAE처럼 주요 블록을 잇는 중견국이 점차 주목받는 흐름이 나타난다. 셋째, 규범과 제도의 신뢰도가 높은 지역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공급망의 투명성, 시장의 안정성, ESG 기준의 성숙도 등은 자본이 머무르는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규칙이 약해지는 듯 보이는 환경 속에서도 오히려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춘 곳이 새로운 프리미엄을 형성하는 모습이다.
앞으로의 기회는 단일한 중심을 넘어 서로 다른 영역이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블록과 블록 사이, 기술과 규범 사이, 안보와 산업이 교차하는 접점에서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다. 다중축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국가가 더 강한가보다 어느 공간이 연결의 허브가 되는가에 가깝다. 한국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은 경제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균형 잡힌 시각과 전략적 대응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변화의 속도가 아닌, 그 흐름을 어떻게 읽고 연결하느냐다.

미래 전략산업으로 꼽히는 테슬라의 이차전지 생산 거점인 네바다 기가팩토리 전경 ©위키피디아
글. 이상현(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
ℹ️ 이 글은 미래에셋증권 매거진에서 발행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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