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는 9시 출근자의 메신저가 고요한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침 9시부터 메신저가 반짝였다. 나와 같이 일하는 대리였다. “주드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후배와 나는 회사 1층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클리셰는 물밀듯이 밀려왔다. 후배는 그만둔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이유가 궁금했다. 후배는 조직문화가 안 맞는다고 했다. 후드티도 못 입는 경직된 문화가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유일 테다.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찔렸다. 과장이자 사수인 내가 퇴직 사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후배에게 지적하고 가끔 한숨까지 푹푹 쉬던 며칠간이 떠올랐다.
후배는 3개월 전 입사했다. 교육 컨설팅 회사 출신으로 일반 기업도, 인사팀도 처음이었다. 컨설팅 회사의 방식이 몸에 뱄다. 우리 회사는 1~2페이지의 워드 보고서를 썼지만 후배는 10장 이상의 PPT 보고서에 익숙했다. 후배의 보고서는 콤팩트하지도, 꼼꼼하지도, 빠르지도 못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하루 이틀 만에 보고서를 작성해 팀장님, 상무님, 대표님까지 보고까지 일주일 컷이었다. 후배는 3개월 이상 프로젝트로 밤을 새운 경험이 많았다. 나는 속도와 칼퇴를 중시했고 후배는 야근이 익숙했다. 차이가 큰 만큼 후배에게 많은 피드백과 수정사항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것들은 후배에게 흡수되기보다는 튕겨 나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거나 극대노를 하지는 않았지만 한숨과 짜증은 전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3개월 만에 퇴사할 줄은 몰랐다.
후배가 퇴사하기 전, 근처 서울시 100년 유산 맛집에서 밥 한 끼를 사줬다. 그때 처음으로 다음 달에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은 이전 회사의 팀장과 한다고 했다. 교육 컨설팅 회사의 조직문화가 온전히 느껴졌다. 일은 고되고 힘들었을지라도 밤새 부대끼며 전우애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으로 발전할 만큼 진했던 것 같다. 후드티는 커녕 맨투맨도 망설이게 하는, 수직적이고 건조한 우리 회사에서 지내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일을 가장 우선에 두고 다른 것을 놓친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그동안 세심하게 대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졌다. 그래도 일을 못하고 성장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후배가 미웠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렇게 후배는 퇴사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영 찜찜한 사건이었다. 실무에 자신 있던 내가 후배 관리의 책임까지 있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10년 차 직장인인 나는 회사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전공이 교육공학인 탓도 있을 것이다. 첫 직장이 그룹 연수원인 탓도 있을 것이다. 계열사 이동을 해서 일반 기업의 교육까지 경험한 탓도 있을 것이다. 전공도 교육공학이고 10년의 경력이 모두 교육으로 채워져 있다. 빼도 박도 못하는 교육담당자다. 경력 이직 시장에서 나름대로 경쟁력 있기도 하다. 손에 꼽는 대기업부터 네카라쿠배당토 중 몇몇 기업에도 어렵지 않게 서류합격을 한다. 실무로는 대내외적으로 검증됐다는 뜻일 테다. 혼자 일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나는 10년 차 교육담당자다.
자신감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생겼다. 2년 전 경력직으로 입사해 리더십 교육을 전담했다. '리더십 전담'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비해 무기는 없었다. 담당자가 나 혼자였고 전임자는 품의서 파일 세 개만 남겼다. 그때부터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길을 고군분투했다. 혼자서 30명의 팀장님들을 인터뷰하며 전사의 교육체계를 수립하고 실현해 나갔다. 전국 출장도 다녔다. 40차수, 320시간의 전사 교육을 진행하며 대전, 광주, 대구, 부산을 찍었다. 50명의 리더십 다면 진단 분석, 팀장 리더십 교육, 교육 뉴스레터 발송, 핵심가치 사례 공모전까지 1인 담당자로서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1년을 열심히 하다 보니 강하게 컸다. 덕분에 회사에서는 내 밑에 한 명을 더 뽑아 주시기로 했다.
내 밑으로 뽑아 주시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밑’은 과장에게도 있고 대리에게도 있다. 그러나 대리를 위해서 사람을 뽑아주는 것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는 과장에게 주어지는 역할 때문이다. 과장의 첫 번째 역할은 업무의 방향성을 스스로 정하고 기획하는 것이다. 두 번째 역할은 업무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팀장과 사원 대리의 연결고리가 돼야 한다. 세 번째 역할은 내 일도 잘하면서 후배 업무 퀄리티를 보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후배를 교육하며 노하우를 전수한다. 정리하니 간단하게 보인다. 그러나 3년째 과장으로 살고 있는 입장에서 결코 쉽지 않았다.
교육을 담당하는 과장이 정해야 하는 방향성은 무게가 무거운 편이었다. 어지간히 큰 회사가 아니고서야 교육담당자는 인사팀 소속인데 내가 겪은 인사팀장님들은 대개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팀장이 찾을 방향성을 대신 찾는 것은 버거웠다.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후배 관리였다. 후배의 업무 퀄리티를 관리하는 것도 보통은 아니었다. 사원 대리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고칠 부분이 많았다. 자동적으로 후배의 과외 선생님 겸 코치가 돼야 했다. 피드백은 생각 없이 뱉어서는 안 됐다. 후배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고칠 부분을 명확한 이유와 함께 말해야 했다. 선배니까 가끔 밥이나 커피를 사주면서 달래는 것은 디폴트였다. 그 와중에 후배가 퇴사하지 않도록 멘탈 관리까지 해줘야 했다. 대리에서 과장되고 6-70만 원 더 받는데 아무래도 월급에 비해 너무 과한 것 같았다.
월급에 비해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도움 되는 선배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나 또한 과장 때문에 퇴사한 대리였기 때문이다. 대리 시절 나는 관심이 회사밖에 있었다. 일에는 관심 없었지만 아이디어는 많았다. 내 위의 과장은 이걸 이용했다. 그녀는 부지런해 생산량이 어마어마했지만 고지식했다. 아이디어가 빈약했던 그녀는 회의를 해서 내 아이디어만 쏙쏙 뽑아갔다. 그리고 팀장님과 바로 커뮤니케이션해 혼자서 추진했다. 팀장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기회를 독점했다. 그리고는 매년 S고과를 받았다. 팀장과의 접점이 적었던 나는 이 판도를 뒤집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기심에 치를 떨며 이직했다. 그리고 후배가 생긴다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후배를 이용하기보다 도움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은 현실과 달랐다. 업무 능력이 성에 차지 않은 후배는 예상하지 못했다. 알아서 잘하는 장밋빛 후배만을 상상했다. 나의 위기였다. 잘하는 일을 하게 해 주려고 장점을 물어보자 후배는 창의적이고 아이디어를 잘 내는 것이라 답했다. 그러나 후배는 정작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다. 후배는 자신의 장점을 몰랐다. 이후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해 주려 탐색에 들어갔다.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던 나는 좋아하는 일이 뭐냐고 물었다. 후배는 모르겠다고 했다. 후배의 장점을 활용할 수도, 알 수도 없었다. 의도와는 달리 업무를 고치라는 피드백만 반복됐다. 그러나 그 마저도 고쳐지지 않았고, 나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감성 케어는 놓쳐버렸다. 결국 후배는 퇴사했다. 나는 도와주려는 마음은 있었지만 서툴렀던 '초보 과장' 이었다. 그때부터 팀장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억울함과 책임감 그 사이 어딘가 내가 있었다. 고민과 자책을 넘나들 때 메일함에는 후임 후보자의 이력서가 도착했다. 그렇게 나는 면접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