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잘하는 방법

임팩트 있는 카피를 만드는 세줄일기

더퀘스트

2019.10.1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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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편애한다. 바닐라맛, 초코맛이 아닌 ‘최선을 다해 꾹꾹 눌러 담은 맛ʼ이 좋다.

하겐다즈가 경쟁 업체와는 다른 특별한 재료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신선한 크림과 우유 같은 평범한 재료만 쓴다. 그런데도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유난히 맛있는 이유는 뭘까?

 

 

= 하겐다즈 공식 인스타그램 캡쳐

 

비밀은 밀도에 있다. 하겐다즈는 컵 안에 최소한의 공기만 남기고 밀도 있게 아이스크림을 담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밀도 덕분에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은 쉽게 녹지 않고 한스푼만으로도 맛이 강하게 전해진다.

 

크리에이티브도 결국 밀도다.

요즘 소비자들은 단 1초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엄지로 스마트폰 화면을 슥 밀어 올려 인스타그램의 다음 피드로 넘어가는 시간, 리모컨 버튼을 눌러 다른 채널로 넘어가는 시간 안에 눈길을 사로잡아야 한다. 2018년 미국 슈퍼볼 경기 앞뒤에 30초짜리 TV 광고를 내보내는 비용은 58억 8,000만 원이었다. 먼 나라 이야기인 데다 워낙 큰 금액이다 보니 이렇게 말해도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잘 와닿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인기 예능 앞뒤에 붙는 30초짜리 광고 비용은 얼마일까.


한 번 방송되는 데 1,250만 원, 초당 환산하면 21만 원 정도다.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통장에서 21만 원이 빠져나간다고 상상해보라. 그 광고를 온에어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 즉 광고주들은 그래서 이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의 임팩트를 남기기를 바란다.

 

광고는 특히 돌출도와 임팩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 광고 철학이기도 하다.

힘없는 백마디 말보다 임팩트 있는 한마디 말이 소비자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

 

밀도 높고 임팩트 있는 카피를 쓰기 위해 나는 ‘세줄일기’ 앱 활용해 훈련했다.

 

 

 



 

말 그대로 하루 일기를 단 세 줄에 녹여내는 것이다. 처음 세줄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너무 할 말이 많았다. 오늘 하루 동안 뭘 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한 줄 한 줄을 굳이 길게 늘여서 그날의 사건을 나열하는 식의 일기가 되었다. 여기도 갔다가 저기도 갔다가 잠들었다, 뭐 이런 식의 구구절절함이었다. 공기를 많이 머금은 퍼석한 맛의 아이스크림 같은 일기였다.

 

그런데 꾸준히 쓰다 보니 글의 길이가 줄어들었다. 하루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면만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임팩트 있는 순간만을 담을수록 그날 하루가 더 또렷하고 특별하게 기억되었다. 별일 아닌 일이지만 그 순간 느낀 강렬한 감정의 단면을 크게 잘라낸 글과 그림이 그날의 일기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세줄일기는 광고와 닮은 점이 참 많았다.

많은 정보 중 중요한 것을 추려내 짧게,

잘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그랬다.

 

일반적으로 광고에서 사용하는 카피도 길이가 짧다. 그런데 광고주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다. 물론 비싼 비용을 지불하다 보니 제품이 얼마나 좋은지 A부터 Z까지 다 말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많은 메시지를 담으려고 하다가는 하나의 메시지도 제대로 못 남길 확률이 높다. 우리는 광고주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짧게, 임팩트 있게, 함축적으로 담아야 한다.

 

 


 

 

달콤함에는 위험이 보이지 않는다.예쁘고 맛깔나 보여서

그 뒤에 숨겨진 ‘단거’의 ‘댄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물론, 그 위험을 알아채더라도 쉽게 그 맛을 포기할 수는 없다.

- 2018년 4월 11일, 한남동 바아Baaa에서.

 


 

 

이른 아침부터 촬영 중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덥다.

시바, 너 덕분에 개시원하다.

- 2019년 8월 5일, 삼청동에서.

 

세줄일기를 쓰는 행위는 문장의 밀도를 높이는 데 분명 도움이 되었다. 세 줄이라는 제한된 설정은 생각의 길이를 압축하는 힘을 키워주었다. 제한된 분량 덕분에 오히려 내용에 긴장감이 더해졌다.

세줄일기를 쓰면 쓸수록 일본 고유의 단시, 하이쿠가 떠올랐다. 일본의 문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세 줄이라는 엄격한 형식 아래 최대한의 것을 표현하고자 노력해왔다.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 마쓰오 바쇼, 《바쇼 하이쿠 선집》, 류시화 옮김(열림원, 2015), 182쪽

 

세 줄로 이루어진 짧은 글 안에 너무도 선명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세 줄만 보고도 작가가 묘사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 듯 생생하지 않은가. 우리 팀에서 15초의 시간 동안 쓰는 평균 광고 제작비는 1억 3, 500만 원, 나는 이것을 1.35라고 부른다. 1.35는 그 자체로 큰돈이기는 하지만 스케일이 있는 광고를 제작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예산이기도 하다. 물론 최근에는 1억 미만의 디지털 콘텐츠 제작 건도 많아졌다. 제작비가 제한적일수록 크리에이터의 역할은 더욱 커진다. 풍요로운 예산이 주어지면 블록버스터급 광고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제한된 비용과 시간 아래서 더 빛나는 크리에이티브가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1.35면 모든 것을 담기에 충분하다. 주어진 시간이 짧다고, 주어진 예산이 적다고 막막해 하기보다 오히려 그걸 역이용해 밀도 있게 담아낼 방법을 찾아보자. 크리에이티브는 결국 밀도다.

 

 

 


 

"이 책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하우만을 담지는 않았다. 묵묵히 하다 보니 단련으로 이어진 나의 일상과 생각을 한자 한 자 써나갔고 꾸준히 쓰다 보니 한 권의 책이 되었을 따름이다. 오직 크리에이티브만을 향한 발악을 진솔하게 담았으니 나름 건질 만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습관은 평범하지만 과정은 평범하지 않았던 나날들의 진심이 투명하게 전해진다면 더없이 좋겠다. 아무쪼록 재미나게 읽어주길 바란다."

- 오롯이 혼자 되는 새벽녘에 이채훈(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에이티브는 단련된다』 읽어보기 http://bit.ly/2PmcaG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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